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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Vol.40 9월호] 미디어 속 보건의료이야기 :: 과학, 윤리와 타협해야 할까 - 장편소설 <죽음의 해부>




글. 양금덕 기자 (청년의사)


“홀스테드는 중요한 인물이네.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란 말일세. 그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의학적 진보를 이룰 사람이네. 만약 자네가 그의 생명을 단축시켜 버린다면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가 될 걸세.”(<죽음의 해부> p.508)



천재의사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 죄를 다른 의사가 뒤집어 써 곧 교수형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면, 그 사실을 알릴 것인가.


소설 <죽음의 해부>는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천재의사의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실존 인물이기도 한 윌리엄 홀스테드는 인류 최초로 마취제를 발명한 19세기 의학계의 거물이지만, 평생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가 로렌스 골드스톤은 동 시대를 살았던 의사 윌리엄 오슬러가 남긴 ‘존슨홉킨스 병원의 내부 역사’라는 원고 속 이야기를 토대로, 홀스테드가 수많은 수술을 할 때 마약을 복용한 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하고 픽션을 그렸다.


소설에는 역사 속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시체해부, 마약밀매, 불법 낙태시술 등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는데, 시대를 떠나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착각마저 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89년은 여전히 죽은 사람의 몸을 토막 낸다는 점에서 ‘해부’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이 남아 있던 시기다.


주인공 에프라임 캐롤은 인체에 대한 연구를 하는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임상의학부 과장인 오슬러 교수와 함께 일하고 있다. 시체 안치소에서 오슬러 교수의 해부학 실험에 참관하던 어느 날, 신원미상의 젊은 여성의 사체를 본 오슬러 교수는 황급히 해부를 중단한다. 동시에 온 몸이 굳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 동료 의사 조지 터크.


캐롤은 교수의 이상 반응에 당황해 하지만 이내 터크와의 저녁시간을 보내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그날 이후 터크는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며칠 뒤 그의 집에 찾아간 캐롤은 그가 숨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캐롤은 의사인 터크가 콜레라로 보이는 증상을 치료하지도 않은 채 홀로 죽어간 것에 의아해 하고, 결국 콜레라가 아닌 비소 중독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경찰에 알린다.


이후 캐롤은 터크가 마약밀매와 불법 낙태 등을 하면서 큰 돈을 모은 것을 알게 되고 그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상류층 은행가의 딸인 에바게일의 부탁으로 캐롤은 그녀의 절친인 레베카의 행방을 쫓다가 며칠 전 시체안치소에서 봤던 젊은 여성의 시체가 레베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는 소설 첫머리에 언급된 코난 도일의 진단 추리, 셜록 홈스의 수사과정을 보듯 흥미롭게 전개된다.


레베카가 왜 시체로 발견됐는지, 그 시체를 보고 놀란 오슬러 교수와 터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밝혀가면서 사건은 더 복잡해진다.


캐롤이 사건에 깊이 관여할수록 해결보다는 오히려 꼬여가고 레베카와 터크를 죽인 범인이 당대 존경받는 의사인 홀스테드라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약물 중독에 벗어나지 못했던 홀스테드가 터크로부터 약물을 구하기 위해 불법 낙태 시술을 했고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터크는 홀스테드에게 낙태수술을 계속 하도록 협박을 했고 결국 그는 비소로 터크를 살해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전말을 오슬러 교수가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오슬러 교수는 홀스테드를 감싸려 드는데….


“원래 홀스테드는 제일 먼저 경찰서로 가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컸어. 명망있는 의사에게 살인자가 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운명이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당장 볼티모어로 돌아가라고 했네.”(<죽음의 해부> p.510)


“홀스테드를 구할 수 있다면 누군가 며칠 감옥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홀스테드는 계속 연구를 해야하니 말일세.”(<죽음의 해부> p.513)


이 소설은 동료 의사의 부정행위에 대해 눈감아주는 의사의 행동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저자는 “의학의 발전과 인류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타인의 비윤리적 행위를 무시했다면, 그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과거 나치의 생체실험과 같이 비윤리적인 행위가 현대의 의료발전에 일부 기여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사라서 의학 발전을 위해서라면 그의 과정상의 잘못도 용서되어야 하는 것일까.


한 의료진은 말한다. 윤리적이지 않은 의사는 비윤리적인 연구나 상황에 놓을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다고. 그래서 자율성 존중, 선행, 악행금지, 정의 등으로 불리는 의료윤리(4원칙)는 시대를 뛰어 너머 지켜져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이 책을 읽으며, 의료 윤리와 의료 발전 중 무엇을 선택할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시길 바란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