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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이슈/보건의료이슈

[Vol.32 1월호] 보건의료이슈 :: 해외연수를 통해 되돌아본 한국 의료

 

 

 

 

 

글. 허대석 교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외국에 가면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해외연수기간에 미국 UCLA대학병원 내과, 시카고대학 의료윤리센터, 그리고 2014년 11월부터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위탁 운영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 셰이크칼리파왕립병원(Sheikh Khalifa Specialty Hospital: SKSH)에서 가진 시간들은 우리나라의 의료 환경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재조명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by Phallnn Ool,http://www.letscc.net/detail.php?idx=354209&k=medical

 

보편화된 의료기술

 

미국의 대학병원과 아랍에미리트의 왕립병원 방문 후 첫 번째로 느낀 점은 미국이나 중동의 대형병원 시설과 의료기술은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질병을 진단하는 도구로 CT, MRI, PET과 같은 영상검사가 시행되고, 최종진단은 병리검사결과를 근거로 한다. 내시경을 이용한 각종 시술이 보편적으로 이루지고 있으며 다양한 약제가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되고 있다.

 

같은 약제들이 다국적 제약회사에 의해 전 세계에 보급되고 있고, 미국에서 신약이 출시되면 한국과 중동에서 거의 동시에 그 약을 사용할 수 있다. 많은 한국의료진이 미국 연수를 다녀오고, 중동 병원까지 가서 일하는 오늘날, 약이나 시술을 통한 의료기술은 이미 세계적으로 표준화(global standard)되어가고 있다.

 

다양한 의료제도

 

의료가 기술적인 면에서는 표준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반면,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나라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주정부의 지원을 받는 UCLA 대학병원은 공공병원임에도 저소득층이 대부분인 Medicaid환자를 진료하지 않고 있었다. Medicaid환자는 community hospital을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대학병원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매년 국정감사의 지적사항으로 서울대학교 병원과 같은 국립대학병원이 더 많은 의료급여환자를 진료하도록 요구하는 한국현실과 너무도 달랐다. 납부하는 의료보험료 액수에 따라 의료기관 선택권이 엄격하게 결정되는 시장경제 방식인 미국 의료제도의 단면이다.

 

한편, UAE에서는 모든 의료서비스가 자국민에게는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집과 차까지 국가에서 거의 무상으로 주는 사회복지에 익숙한 UAE국민들은 입원해서 사용하던 병원 소유의 휠체어를 퇴원시 집에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환자가 입원중 사용하던 전동침대까지 집으로 가져가겠다고 해서 병원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서울대병원 파견 직원이 만류했더니, 해당 환자 가족이 대통령실에 민원을 제기했고, 그 민원이 받아들여져 결국 전동침대를 가져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UAE에서 일하는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은 SKSH와 같은 전문병원을 이용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무상인 자국민과 달리, 외국인은 미국병원 수준의 고가로 책정되어 있는 의료비를 100% 본인 부담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내국인 근로자와 동일하게 어느 병원에서나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은 의료서비스에 관한한 외국인노동자에게 대단히 관대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문화적 요인과 윤리 문제들

 

생명을 다루는 의료분야는 다른 과학기술 분야에 비해 의료기술이 발전할수록 윤리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병원에서 일어나는 윤리문제의 유형과 그 대처 방법은 나라마다 문화적 요인에 따라 다르다.

 

이슬람 문화권인 UAE 병원은 병실뿐만 아니라 외래 진료실도 남-여로 성별이 구분되어 있고, 병동도 남성병동과 여성병동이 분리되어 있었다. 여자환자를 남자의사가 진료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서 여의사가 인기가 있다. 마약사용을 음주처럼 금기시하고 있어, 현지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겪는 어려움 중 대표적인 것은 마약성 진통제를 쉽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마약성진통제의 처방이 어려워 말기 암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또한 UAE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의식이 없는 말기 남성 암 환자의 심폐소생술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가족에게 연락하면, 3-4명의 부인과 많은 자식들이 모이는데 가족 내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의료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모든 의료행위를 끝없이 계속하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연명의료 문제뿐만 아니라, 의료분쟁과 관련된 윤리적 갈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위기여서 미국대학병원 대부분에서 의료윤리전문가(ethics consultant)가 일하고 있다. 이번에 방문한 시카고대학 의대는 1983년부터 McLean Center for Clinical Medical Ethics를 개설하고 의료윤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임상의사를 중심으로 의료윤리전문가를 양성하고 있었다. 시카고대학의 의료윤리센터 책임자인 Mark Siegler교수는 그동안 410명의 의료윤리 전문가를 양성하여 미국 전역에 책임자로 일하게 한 시카고 의대의 교육기능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보였다.

 

미국의 대학병원들이 의료윤리에 대한 전문가를 고용하고 의료윤리 문제해결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은 환자, 보호자들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불필요한 의료분쟁을 최소화할 수 있어 분쟁에 수반되는 법적 비용을 현저히 경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되돌아보는 한국의 의료현실

 

한국에서 UCLA 병원을 방문한다고 하니, 전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을 성공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한국 의료제도에 대한 발표를 요청받았다. 1시간 정도 강의하고 질문을 받는 자리였는데. 짧은 시간에 큰 비용을 투자하지 않고도 유아사망률(1,000명당 미국 6.0, 영국 3.8, 한국 3.0), 평균 수명 등 여러 가지 국민건강지표에서 미국이나 영국을 능가하는 성적을 거둔 비결에 대해서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저수가 정책을 유지하여, 국민들의 의료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는 점을 부각하며 답하였다. 하루에 환자를 한자리 수준으로 보는 미국의사들은 한국 의사 1인당 진료량에 매우 놀라워하며 그런 환경에서 의료의 질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30년전 새로운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 대학병원에 가서 규모와 첨단시설에 놀라던 때와 이번 방문은 느낌이 같지 않았다. 이제는 시설과 의료기술면에서 우리나라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적은 수의 환자진료에도 힘들어하는 미국병원들의 비효율성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셰이크칼리파왕립병원에서는 여러 문화적 요인으로 좋은 시설과 의료진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병원 운영을 보며 무상의료의 문제점을 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병원시설을 갖추고도 고비용 때문에 많은 국민이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미국과, 무상의료인데도 병원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국민이 해외로 나가 진료를 받아야 하거나 자국병원도 한국에 위탁 운영해야 하는 UAE를 보면서, 대부분의 국민이 적은 비용부담으로도 많은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한국의료에 대한 긍지를 느꼈다.

 

우리나라의 의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3분 진료가 당연시 되는 풍토, 보호자가 동거하며 간병해야 하는 후진국형 병실 문화, 야전병원같은 다인실, 의료쇼핑을 통제할 수 없는 의료제도... 이런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이 MERS와 같은 질환에서는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 2015년 뼈저린 경험을 하였다. 의료기관이 진료량을 증가시켜 저수가로 인한 피해를 만회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미국처럼 시장경제에만 맡겨도, UAE처럼 무상복지로 운영해도 의료는 저효율고비용이 될 위험이 높다. 복지개념과 시장논리를 적절히 융합한 한국의료제도의 운영체계를 국제표준에 부합되게 조금만 개선한다면, 한국 병원이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아랍병원의 운영을 의뢰받듯이, 의료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나라에 한국의료가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해 본다.

 

※ 본고는 외부 필자의 원고로서 <공감 NECA>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